설화/시
주역각시 이야기
서창동 회산마을 출신 임란공신(壬亂功臣) 회재 박광옥(朴光玉)선생에게 대단히 영특(英特)한 따님이 한 분 있었는데 글은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하고 짐승의 말소리(?)까지를 알아듣는 신통한 재주를 지녔었다.
그녀 나이 과년(瓜年)(여자나이 15~6세 때를 이름)이 되어 전북(全北) 남원(南原)의 명문(名門)인 노씨(盧氏)가문[당주(堂主)의 노정은 이조판서를 지냈음]에 출가를 했는데... 결혼 첫날밤 쥐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듣고 웃은 것이 화근이 되어 시집에서 퇴박을 맞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필경 처녀시절에 정숙한 남자가 있어 그 사람을 생각하고 웃었다는 엉뚱한 트집이었다. 하기야 그때 당시의 풍습으로 갓 시집온 양가(良家)집 규수가 신혼 첫날밤에 웃는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며 개화된 지금 세상이라도 조금은 말썽이 될 법한 일이었다. 아무리 변명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밑 쳐진 채 친가에서 앙완(怏椀)의 한세월(閒歲月)을 보내는…그래서 남편과의 접촉이 일체 끊어진 상태에서 그 억울한 원왕을 씻을 길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몇 년의 세월이 흘러간 뒤의 일이었다. 나뭇잎들이 짙은 초록빛으로 물든 초여름 어느 날, 시아버지 노정공이 불쑥 이곳 사돈댁을 찾아왔다. 사돈 박광옥 선생과는 전부터 친숙한 사이로 자식들 간의 불합(不合)은 그렇다 해도 옛 친구의 두터운 정리까지를 저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노공(盧公)은 사돈댁에 오는 길 초 어느 주막집에서 쉬고 있는데 그 집 툇마루에 떨어져있는「제비새끼」한 마리를 무심결에 도포 속에 넣고 왔다. 노공은 자부(子婦)의 인사를 받고 차려 내온 술잔을 손에 들면서 사돈 박공에게 사과 겸 이렇게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영조(英祖)임금께서는 아드님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뒀지만 우리야 어디…」하고 씁쓸한 얼굴로 말끝을 흐리는 것이었다. 자기 말을 듣지 않고 아내를 퇴박한 아들을 탓하고 자신(自身)의 무위(無爲)를 자책(自責)하는 말이기도 했다. 박공(朴公)은 그저 쓸쓸히 웃을 뿐 말이 없고 방안 분위기는 무겁고 침울하기만 했다.
그때였다. 다소곳이 꿇어앉아 술시중을 들고 있던 박부인(朴夫人)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한 말투로 「아버님, 어서 약주 잔 드셔요. 그리고 그 아버님 도포 속에 제비새끼를 놓아 주십시오. 어미가 저렇게 울고 보채고 있질 않습니까?」하고 앞마당 빨래 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과연 거기에는 어미제비 한 마리가 이쪽을 보고 슬픈 목소리로 재잘거리고 있었다. 노공은 조용히 일어서서 도포 속에 넣고 온 제비새끼를 꺼내어 마루바닥에 놓아주었다.
그러자 어미제비는 재빨리 그것을 입에 물고 날아가고… 그래서 박부인에 대한 혐의(?)는 완전히 풀리고 신원(伸寃)은 되었지만 시댁으로 돌아가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다.
그녀는 일생을 친정에서 지내면서 아버지를 도와 막대한 가산(家産)을 이루게 하고 그 재산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때 많은 창의(倡義)를 도우는 등 큰 공훈을 세우게 했다. 그녀가 임종에 즈음하여 유언하기를 「나는 끝내 친정에서 생을 마치고 이곳에 묻히지만 시집 7대손이 이장을 해 갈 것이니 그 때까지만 잘 부탁한다」하고 눈을 감았다.
과연 그 말이 적중하여 지금은 남원(南原)땅 노씨 문중 선산에 묻혀있는데 사서는 물론 극역까지를 통달하여 만물을 지기하고 심지어 짐승의 말소리까지를 알아듣는 재능(才能)을 추앙하여 세칭「주역각시」라는 칭호로서 지금도 널리 인구(人口)에 회자되고 있다.
회재 선생 시
해바라기 꽃을 읊음
영특한 성격아
모든 꽃과는 다르니
구경하다 옷자락
이슬에 젖어도
아무렇지 않아
가련하다 동쪽 담 밑에
뿌리를 박았기에
아침햇볕 못 보고
저녁별만 보는고야
1577년 여름(52세 때)
회재 선생 시
천안 선화루에서
아침엔 웅진을 건너고
저녁에는 환주에 이르러,
틈을 내어 나 홀로 선화루에 비겼구나.
병든 뒤라 추위가 두려워 양쪽에 장막치고,
느리게 왔다가 바로 떠난 천년 전 학이요.
다른 고을 풍경이라 모두가 새롭고,
산속에 길 하나 옛날에 놀러 왔지.
황성에 두어잔 술 마시지 않으면서도,
머무르면서 잠깐이라도 근심, 걱정 녹여본다.
1579년 2월(54세 때)
한양 가는 길에 천안을 지나면서 읊은 시